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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뭘까 시리즈 Ⅲ] 전문가와 작업자는 왜 서로 다른 위험을 볼까요?

  • 작성자 사진: 이세인
    이세인
  • 3일 전
  • 4분 분량

✒️ 안전팀이 빨간 칸으로 매긴 작업 앞에서 베테랑은 무덤덤하고, 평가표가 초록색인 작업 앞에서 신입은 불안해합니다. 이 글은 그 간극이 누군가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사람마다 서로 다른 잣대로 위험을 재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40여 년 전의 한 심리학 실험에서부터 풀어봅보려고 합니다.


👍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 "왜 저 사람들은 이게 위험한 걸 모를까"라는 답답함을 느껴보신 안전 담당자

  • 위험성평가 점수와 현장의 체감 사이의 거리가 늘 마음에 걸리셨던 분

  • 베테랑의 무덤덤함과 신입의 불안을 둘 다 안전의 자원으로 쓰고 싶으신 분


1970년대 말 오리건, 위험 순위 매기기 실험


미국 오리건주 유진. 심리학자 폴 슬로빅(Paul Slovic) 연구팀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조금 특이한 과제를 줍니다. 원자력, 흡연, 자동차, 엑스레이, 수영 같은 30가지 활동과 기술의 목록을 주고, 사망 위험이 큰 순서대로 줄을 세워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참가자는 여성유권자연맹 회원들, 대학생들, 지역 직장인 모임, 그리고 위험 평가를 업으로 하는 전문가들. 네 부류였습니다.

결과는 연구팀이 보기에도 흥미로웠습니다.

여성유권자연맹과 대학생 그룹은 원자력을 30개 중 1위에 올렸습니다. 직장인 모임은 8위. 그런데 전문가들은 원자력을 20위에 두었습니다. 엑스레이는 정확히 반대였습니다. 일반인 그룹들은 17~24위로 낮게 본 반면, 전문가들은 7위로 꽤 높게 본 것입니다.


같은 방사선인데 순위가 엇갈립니다. 자, 누가 틀린 걸까요?

당시의 통념은 답을 정해 두었습니다. "일반인이 몰라서 그렇다. 정확한 정보를 주면 전문가처럼 보게 될 것이다." 라는 가정이었죠.


그런데 슬로빅 연구팀이 데이터를 파고들수록,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합니다.


위험 순위 매기기 실험
위험 순위 매기기 실험


위험을 보는 두 장의 지도


연구팀은 전문가들의 순위를 연간 사망자 수 추정치와 겹쳐 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거의 그대로 포개졌습니다. 전문가에게 위험이란 곧 '죽는 사람의 수'였던 것입니다. 우리 위험성평가표의 빈도×강도와 같은 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반인 쪽이었습니다. 일반인의 순위는 사망자 수와는 어긋났지만,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무언가와 정확하게 나란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더 결정적인 단서가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그래서 매년 몇 명이 죽을 것 같습니까"라고 따로 물으면, 전문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추정치를 내놓았습니다. 숫자를 몰라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알면서도, 위험을 판단할 때는 사망자 수가 아닌 다른 것을 함께 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리측정 패러다임(Psychometric Paradigm) 사람들이 위험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측정한 연구 틀. 분석 결과 위험 인식은 크게 두 축으로 정리됩니다. 1. 두려움(dread) — 통제할 수 없는가, 한 번에 큰 피해를 주는가, 돌이킬 수 없는가, 내가 선택한 위험인가. 2. 낯섦(unknown) — 눈에 보이지 않는가, 새로운가, 피해가 한참 뒤에 나타나는가. Slovic, 1987, Science

이 두 축으로 원자력과 엑스레이를 다시 보면 엇갈린 순위가 단번에 설명됩니다.

엑스레이는 내가 선택해서 찍고, 병원에서 익숙하게 봐 왔고, 잘못되어도 피해는 개인 단위에 머무릅니다. 원자력은 내 손 밖에 있고, 낯설고, 사고 한 번이 도시 하나를 흔듭니다. 사망자 수라는 자로 재면 비슷해 보이는 두 위험이, 두려움과 낯섦의 자로 재면 완전히 다른 위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문가와 일반인은 같은 세상을 놓고 서로 다른 지도를 그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한쪽이 정확하고 한쪽이 엉터리인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측정한 두 장의 지도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재고 있던 것이 무엇이냐면요


여기서 멈추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합시다"라는 좋은 말로 끝나버리게 됩니다.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두려움 축이 재고 있던 항목을 다시 읽어보세요.

통제할 수 없음. 한 번에 큰 피해. 돌이킬 수 없음. 어딘가 낯익지 않으신가요?


지난 글에서 우리는 가장 큰 사고가 평가표의 초록색 칸에서 걸어 나온다고 했습니다. 빈도가 낮다는 이유로 곱셈에서 작아져 버리는, 그러나 한 번이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중대재해(SIF)의 얼굴 말입니다. 사람들의 '두려움'이 재고 있던 것이 바로 그 얼굴과 겹칩니다.


빈도×강도의 곱셈은 '드물다'는 이유로 그 위험을 작은 숫자로 눌러버립니다. 그런데 사람의 직감은, 거칠고 부정확할지언정, 곱셈이 놓치는 그 차원을 계속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은 계산의 오류가 아니라, 평가표에 없는 항목을 재는 또 하나의 측정기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장으로 — 간극은 양쪽 방향에서 생깁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우리 현장으로 가져와 보겠습니다. 현장에서 인식의 간극은 두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한쪽에는 베테랑의 무덤덤함이 있습니다. 


안전팀이 빨간 칸으로 매긴 고소작업이나 중량물 취급 앞에서, 20년 차 작업자는 별다른 긴장이 없습니다. 위험이 줄어든 걸까요? 아닙니다. 매일 반복된 작업은 '낯섦' 축의 값이 0에 수렴합니다.


익숙함은 위험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느끼는 측정기를 끄는 것입니다. 위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알람만 꺼진 상태입니다. 슬로빅은 후속 연구에서 사람이 위험을 판단할 때 계산보다 느낌이 먼저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감정 휴리스틱), 그 느낌이 꺼져 있으면 숫자가 아무리 빨간색이어도 몸은 반응하지 않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다른 쪽에는 신입의 불안이 있습니다. 


평가표상으로는 초록색인 야간 단독 점검을, 들어온 지 석 달 된 신입은 유독 불안해합니다. 겁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아직 '낯섦' 축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살아 있는 측정기는, 종종 베테랑의 꺼진 측정기가 더 이상 잡지 못하는 신호를 잡아냅니다.


그래서 "누구의 인식이 맞느냐"는 질문은 출발부터 잘못된 질문입니다. 필요한 것은 교정이 아니라 포개기입니다. 안전팀의 평가표, 베테랑의 무덤덤함, 신입의 불안 — 이 세 장의 지도를 한자리에 포개놓으면, 각자가 보지 못하던 자리가 비로소 드러납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이번에도 거창한 제도 변경 대신, 다음 위험성평가 회의나 TBM에서 5분짜리 실천 하나를 권합니다. 점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각자 이렇게 한마디씩 해보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작업 중에 가장 마음에 걸리는 작업 하나만 꼽는다면?"

그리고 그 답을 평가표 옆에 나란히 놓아보세요. 두 가지 어긋남이 보일 것입니다.


  • 점수는 높은데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은 작업 — 익숙함이 측정기를 꺼버린 자리일 수 있습니다.

  • 점수는 낮은데 누군가 마음에 걸린다고 말한 작업 — 평가표가 재지 못한 차원이 숨어 있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답이 갈릴 때 진짜 대화가 시작된다고 말씀드린 바 있는데, 이번에도 같습니다. 점수와 느낌이 갈리는 그 칸이, 바로 대화의 출발점입니다.


이런 인식의 간극은 개인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경영진과 현장, 부서와 부서 사이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우리 조직의 집단별 인식 차이를 한 번 정량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으시다면, 세이프티온솔루션의 안전문화 진단이 좋은 출발점이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SAFER Coach 세인이와 함께 생각해 보기〕

  • 우리 평가표에서 점수는 높은데 현장에서는 아무도 불안해하지 않는 작업이 있나요? 그 무덤덤함은 통제가 잘 되어서일까요, 익숙해져서일까요?

  • 반대로 점수는 낮은데 유독 "마음에 걸린다"는 말이 나오는 작업이 있나요? 그 불안은 무엇을 재고 있는 걸까요?

  • 신입이나 외부 인력이 우리 현장에서 가장 놀라거나 불안해했던 장면은 무엇이었나요? 우리는 그 반응을 데이터로 들었나요, 엄살로 들었나요?

  • 우리 조직에서 전문가(안전팀)의 지도와 현장의 지도가 가장 크게 어긋나는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 두 지도를 한자리에 포개 본 적이 있나요?


〔참고문헌〕

  • Fischhoff, B., Slovic, P., Lichtenstein, S., Read, S., & Combs, B. (1978). How safe is safe enough? A psychometric study of attitudes towards technological risks and benefits. Policy Sciences, 9(2), 127–152.

  • Slovic, P., Fischhoff, B., & Lichtenstein, S. (1979). Rating the risks. Environment, 21(3), 14–39.

  • Slovic, P. (1987). Perception of risk. Science, 236(4799), 280–285.

  • Finucane, M. L., Alhakami, A., Slovic, P., & Johnson, S. M. (2000). The affect heuristic in judgments of risks and benefits. Journal of Behavioral Decision Making, 13(1), 1–17.

  • Slovic, P. (2012). The perception gap: Radiation and risk.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68(3), 6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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